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경쓰는 분은 거의 안 계시겠지만요.

저는 병신영화를 즐겨봅니다.
병신영화를 널리 수집하면서 챙겨보는 정도의 매니아까지는 아닙니다만, 음..그러니까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저는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를 극장에서 본 남자입니다.
...
어쨌든 간만에 클레멘타인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걸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인근 극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가운데의 아주 좋은 자리에서 양 옆에 방해하는 이 없이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1. 스토리
본래의 스토리는 꽤 흥미로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타인의 몸에 이식되어 분리된 다중인격이 서로 스스로 진짜라 주장하며 싸우는 이야기는 통속적이지만 풀어내기에 따라서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죠. 이렇게 써놓으니 옹고집전 같군요.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이 끔찍하게 불친절하고 괴상한 비약이 심하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서사는 일그러지고, 파편화되고, 심지어는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사실 장태영(주인공)은 다중인격이 아니었고, 장태영2는 그냥 같은 시점에 사고를 당해 같은 병원에 입원한 중환자였을 뿐이며, 그들이 믿고있는 다중인격과 진짜가 되기 위한 행동들은 마약을 통한 암시와 조종에 따른 것이었죠.
마약이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태영(둘 다)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은 대부분 이해가 갈 듯 말 듯한 괴영상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이라면 기술을 필요한 부분에만 사용한 게 아니라 너무 과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감각적이고 뜬금없는 장면은 넘쳐나는 반면에 꼭 해야 하는 설명은 생략되고 축약되었습니다.
조원근은 왜 장태영의 사업을 방해한걸까요? 최박사는 그 마약을 통한 실험으로 무엇을 얻고자 한 걸까요? 왜 실험 대상으로 장태영이 선택되었을까요? 송유하는 왜 죽은걸까요?
감독은 셔터 아일랜드 같은 심리학적 서스펜스물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요?
2. 연출
일단 때깔이 좋습니다. 감독 양반이 감독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감각적이고 때깔 좋게 영상을 뽑았습니다.
물론 이 감독이 다시 감독을 하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때깔이란 측면에서는 클레멘타인이나 맨데이트와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많은 장면들이 마치 무슨 CF 같았습니다. 감독은 예전에 광고 업계에 있었던 걸까요?
CF 같은 감각적인 장면들, 수많은 상징과 암시를 내포한 그야말로 있어보이는 장면들은 그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눈요기는 되겠으나 역시 문제는 이것들이 스토리의 진행에 녹아들지 못하는 과잉 연출들이란 것입니다.
상영시간 내내 화려하고 감각적이고 긴장을 유도하는 장면들이 완급없이 쏟아져 내립니다.
그런데 그게 뭔 소리인지 알아먹기도 힘들고 피곤해요.
격투신은 공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서도 별로입니다. 동작은 절도있고 주먹 꽂는 소리는 쩍쩍 찰져서 좋긴 했지만 합이라던가 전체적인 설계라던가 하는 부분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마지막의 격투신은 약 빨고 싸운다는 설정으로 상처가 자동수복되고, 주먹을 날리면 상대가 저 멀리 날아가고, 상대를 땅에 내리꽂으면 웨이브가 일어나고 하는 마블영화스러운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것도 어째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부분들의 짜집기 같습니다.
3. 결론
이야기 좀 풀 줄 아는 감독이 만들었더라면 제법 재미있었을 것 같은 소재를 뒤틀린 황천의 정액 무더기로 만들어버린 115억원짜리 딸딸이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마약 이름이 시에스타인데, 내가 보기엔 감독이 시에스타를 한 것 같아요.
본래 병신영화라 함은 쌈마이함을 즐기는 맛이 있는 법인데 이 영화는 때깔이 좋아서 쌈마이함 마저도 부족합니다.
로보 게이샤나 맨데이트 같은 건 가끔 울적할 때는 다시 보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고, 친구들에게도 웃음거리로 적극 추천하고는 하는데 이건 그런 용도로도 사용 불가입니다.
병신영화로서도 함량 미달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거라도 보면서 눈을 정화해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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